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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셨습니까?”

일본 전통 방 안이었다. 견이 일어서자 남자 하나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여긴 어디죠?”

남자는 아주 낡은 책 한권을 꺼냈다.

“이거 아시겠습니까?”

견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꿈속에서 초희와 스승님과 함께 쓴 책이었다. 그것도 1권.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남자는 견에게 허리를 굽혀 90도로 인사했다.

“저는 ‘향인(向人) 제약 회사’ 소속 ‘스즈키 이치로’라고 합니다.”

이치로가 다시 고개 숙여 인사 했다.

“저의 선대께서 회사를 창업하시고 물러나면서 이 책을 물려주었습니다.”

남자는 책을 가리켰다. 그는 향인 제약 회사의 후계자였다.

“우리 회사는 400년 전에 처음 창립되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지금은 양약을 주로 만들고 있지만 선대는 한약에 큰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도 ‘향인’ ‘사람을 향하는’ 약을 만들려는 게 선조의 뜻이었습니다. 양약은 대량 획일화 되어 대증 치료에 초점을 맞춥니다. 한방은 몸의 정상화에 초점을 맞추어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준으로 보죠. 하지만 상업 시대가 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현실에 맞추려면 대량 생산 유통은 필수입니다. 과립과 환의 생산이 최적이죠. 선조는 선진적인 사고를 하셨습니다. 400년 전에 대규모 제약 회사를 생각하셨으니 말입니다.”

남자는 창업자의 초상화를 보여줬다. 그림이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흰 수염 노인이었다.

“아버지는 선대의 가르침을 늘 따르고 싶었으나 현대 여건이 맞지 않아 서양 의학으로 눈을 돌리셨습니다. 하지만 늘 마음 한켠으로 부채를 안고 사셨죠. 이제 한약의 부흥을 꿈꾸려 합니다. 저희는 많은 자금을 가졌고 제약법도 주무를 만한 힘을 가졌습니다. 이제 선대의 뜻을 이으려 합니다.”

견은 꿈속에서 일본으로 납치되어 일련의 일을 도와줬던 것을 떠올렸다. 다시 그 일을 하라는 건가? 이들을 내가 왜 도와야 하는가? 400년 전의 무례함처럼 지금도 몹시 무례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제가 도와야 한다는 겁니까?”

“아버지는 제게 한 가지 조건을 다셨습니다. 류견을 이기라고. 그러면 회사를 물려주겠다고. 아니면 당신에게 회사를 물려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정중히 제 도전을 받아주십시오.”

“내가 이기면 회사를 나에게 물려주겠고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책들로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부디 제 도전을 받아주십시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유일한 의술의 신이 있다면 류견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어떻게 안 거죠? 아니, 그 전에 제가 왜 여기에 와있는 거죠?”

“그건 잠시 후에 만날 저의 아버지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부디 제 도전을 받아주십시오.”

이치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 회사에 욕심도 없고요.”

견은 창을 열었다. 어딘지 단번에 알아봤다. 꿈속에서 납치되어 갔던 곳이다. 400년 전과 건물 외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웅장하고 거대했다.

견에게 건물 한 채가 내어졌다. 견을 수행할 사람도 다섯 명이 붙었다. 최고급 음식이 내어져 왔고 건물에 달린 온천에서 목욕도 할 수 있었다.

“우린 이제 많은 바이러스들과 싸우게 될 겁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잠시 후 나타난 이치로의 아버지 코스케였다. 코스케는 꿈속에서 본 흰 수염 노인과 나이, 풍채, 얼굴, 흰 수염 모양까지 같아 깜짝 놀랐지만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저는 열아홉 살, 한국인 류견이라고 합니다.”

“먼 길 와 줘서 고맙네. 난 스즈키 코스케라고 하네.”

“전 먼 길을 온 적이 없지요. 납치 된 것 아닌가요?”

코스케는 잠자코 차를 마시다 견이 쓴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책은 400년 전에 쓰여진 것이 아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잘 보게. 이 책을.”

코스케가 보여준 책은 스승님과 초희와 함께 쓴 책이었다.

“제 스승이신 이시훤 의원과 함께 자란 초희와 제가 같이 쓴 책입니다.”

코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하나?”

견은 질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 했다.

“자네는 꿈속에서 한 일을 자네가 한 일이라고 믿고 있나?”

“도무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제가 한 일이 아니라면 그 책이 어떻게 쓰여 졌으며 어떻게 사장님 손에 있는 걸까요? 선대께서 이 책을 물려주신 거라면서요.”

그때 자신을 일본으로 납치해 완성한 책 아닌가? 견은 참 뻔뻔스러운 사람들이란 생각을 했다.

코스케는 책을 견이 잘 보이게 펼쳤다.

“꿈속에서 쓴 책과 현실에서 쓴 책이 내용이 같았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자네가 얼마 전까지 써온 책이네.”

견은 자세히 책을 펼쳐 내용을 살폈다. 표지나 글은 옛 서적과 같았는데 꼼꼼히 보니 인쇄된 책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누군가 자신의 컴퓨터를 접속한 흔적이 떠올랐다.

“당신들인가요? 내 컴퓨터에서 자료를 훔친 게!”

코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무례하게 굴어놓고 나를 납치한 건가요? 당신들은 왜 이렇게 뻔뻔하죠?”

견은 순간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코스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살려냈으니까.”

“알아듣게 말씀하시죠?”

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대께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아주 귀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더군. 그게 자네 스승, 이시훤이었어. 선대는 성주로서 병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갔었지. 그곳에서 지병인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다행히 이시훤을 만났고, 그 사람이 가루로 된 약을 먹여 구해줬다고 하더군. 적군인데도 그 분은 우리 선대를 환자로 보았을 뿐이야. 그냥 두었다면 죽었을 사람을 적군이라고 외면하지 않았지. 그 일로 이시훤은 큰 고초를 겪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실제로 이시훤은 많은 조선인을 살린 거야. 우리 선조가 그 길로 전투를 중단하고 일본으로 돌아왔거든. 우리 성의 병사는 아주 큰 규모였으니 많은 피해를 줄였을 거야. 우리 선대를 적이 아닌 환자로 보았기에 많은 조선인을 살릴 수 있었지. 선대께서는 그 약이 하도 신기하여 한참 후에 다시 이시훤을 만났네. 그 사람이 쓴 책을 몇 권 구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그 약과 쓰는 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더군. 그리고 얼마 후 이시훤의 사망 소식을 들었지. 대단한 이론을 만든 사람이었는데 그 기록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어.”

견은 아직도 스즈키 코스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아듣게 간단하게 말하지. 내 얼굴이 꿈속에서 만난 사람과 많이 닮았지? 그렇지 않은가?”

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꿈속에서 본 흰 수염 노인과 같은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자네는 400년 전에 없었네. 이시훤은 자네를 알지 못해. 본 적도 없지. 다 내가 만든 가상의 이야기였네. 꿈속에서 본 일본 노인은 나일세.”

견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자네가 어떻게 자네 부모님께 갔다고 했나?”

조선시대 복장을 한 여자가 어머니에게 나타나 갓난아기인 자신을 맡기고 갔다고 했다.

“자네의 출현 자체가 이상하지 않던가? 자네는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았어야 하는 사람이었네. 그리고 이시훤과 함께 획기적으로 의학을 발전시켰어야 할 사람이었네. 하지만 지금부터 얼마 후에 닥칠 인류의 재앙에 그 이론은 돈이 되기 힘들었지. 그 사람들은 자네와 이시훤의 이론을 없애려 400년 전으로 갔어.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네. 그들이 만드는 약은 전세계 일부 사람들만 고칠 수 있다는 걸. 가격 역시 특허 독점으로 가난한 국가에서는 손도 댈 수 없다는 걸. 하지만 한약의 개념은 애초에 양약과 달라 특허 독점도 필요 없고, 약재의 조합이니 제약회사의 공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우리는 그 약을 특허권 없이 만들 생각이었네. 우리가 조금 더 빨랐어. 그래서 자네를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지.”

견은 코스케의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이 시대 저 시대를 왔다 갔다 했다는 건가요?”

코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에 재앙이 일어나서 그로 인해 이득을 볼 사람들이 이시훤과 저의 이론 때문에 이익이 줄어들자 과거로 보내 저를 없애려 했고, 그걸 당신네들이 막으려고 나를 이 시대로 데려 왔다는 거예요?”

코스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사실은 우리가 한 건 아니네. 우리에겐 그런 기술이 없어. 미래에서 온 사람이 한 거네. 정확히 내 후손이지.”

“그럼 내 꿈은 어떻게 된 거죠?”

“그 시대에서 자네를 살게 할 수 없으니 이 시대에서 그 시대를 살게 한 거네.”

“와, 미치겠군요.”

견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도대체 이 노인이 무슨 말을 짓거리는 것이며 나는 도대체 누구며, 꿈속의 나는 또 누구며, 나는 400년 전에 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현 시대의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400년 전 태어난 갓난아기가 이 시대로 와서 꿈속에서 400년 전을 살았는데 그 400년 전 삶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고, 실제 있었을 수도 있었던 일이란 말인가요?”

코스케가 미소 지었다.

“역시 똑똑한 청년이군.”

견은 넋이 나가 멍하니 있었다. 사람 몸 속 흐름이 보이는 것도 이상하고, 조선시대 복장을 한 여인이 부모님께 자신을 맡긴 것, 꿈속에서 본 초희를 현실에서 만난 것, 배운 적도 없는 지식을 다 아는 것……. 애초에 정상적인 것도 없고 합리적인 것도 없다. 이해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말도 안 되는 공상 영화 같은 코스케의 시나리오가 말이 되는 지도 모른다.

“곧 닥칠 재앙에 우리가 앞서야 사람들을 구할 수 있네. 내가 인류 구원의 큰 사명을 가진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내 후대는 그런 사명을 가진 모양이야. 내게는 회사를 일으킬 좋은 기회이지. 그게 내 최대 사명이니 나도 후대와 함께 할 거네. 도와주게.”

이상하고, 환장할 것 같은 대화가 끝나고 코스케가 자리를 뜨려했다. 견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런데 굳이 이 이야기를 제게 왜 하신 거죠? 안 하셔도 됐잖아요? 그냥 제 지식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코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가 우리 편인지 알 수가 없네.”

“그건 또 무슨 소리죠?”

“자네의 지식이 필요하고 인류를 구원할 거라 믿지만 자네가 우리 뜻에 반하면 자네가 반대 지식을 흘려도 우리는 알 길이 없네. 우린 그냥 우리의 뜻을 말해준 것이네. 자네도 우리와 함께할 거라 믿기에 이 말을 미리 한 거네.”

스즈키 코스케는 일본 제일의 제약회사는 물론이고 일본에서 가장 큰 병원도 소유하고 있었다. 분점이 전국적으로 스무 개가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회사 소속 안내인이 견을 안내했다.

“지금 가는 곳은 ‘향인의료원’입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병원이죠. 그곳에서 당분간 묵으실 겁니다.”

도착한 병원은 설명대로 크고 최신식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어 병원인데도 호텔 로비처럼 상쾌했다. 견은 침대에 대자로 누워 머릿속을 비웠다. 생각을 할수록 이상한 일 투성이고 생각을 안 할수록 이곳은 편했다.

‘내가 자네를 살려냈으니까.’

하지만 스즈키 코스케의 말이 머리에 맴 돌았다.

‘나를 살려냈다? 400년 전 갓난아기를 이시대로 보냈다? 그 시대에 있었으면 누군가가 나를 죽였을 거다? 자신들도 이시훤과 내가 썼을 책이 필요하여 꿈속에서 이시훤과 함께 살도록 했다?’

견에게 주어진 임무는 별것 없었다. 환자들을 보고 증상에 맞는 약을 처방하고 낫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곳에는 견과 스즈키 이치로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었다.

지영였다. 아니, 초희였다.

견은 멍하니 초희를 바라봤다. 분명 초희였다. 초희와 눈이 마주쳤지만 초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초희가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이혜교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리신 것 같네요? 저는 올해 서른입니다.”

견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외과적인 것은 현대 의학이 낫습니다. 손댈 것 없습니다. 검사 결과 잡히지 않는데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상 없음, 신경성이란 말을 붙여 돌려보냈죠. 그 사람들이 치료의 대상이 될 겁니다.”

안내자의 설명이 있었다.

첫 번째 여자는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하고 통증이 있다고 했다. 우울증 약을 몇 년 복용했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점점 무기력해진다고 했다. 헛구역질도 나고 아침에는 기운을 차릴 수 없고 저녁이 되면 조금 움직여진다고 했다.

“한방에서는 흉(胸)을 폐(肺)로 보죠. 흉 아래 흉격을 기준으로 흉은 상초면서 복(腹)으로 들어가고 복은 중초로서 흉으로 나오는 곳이죠. 따라서 흉의 문제는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위장에서 생산된 영양을 흉을 통해 몸으로 퍼지고, 몸의 기운은 흉을 통해 속으로 들어가고, 흉은 폐로서의 소모의 중추죠. 가슴이 답답하거나 통증이 나타나는 것은 심번(心煩), 통증은 흉통이라 하죠. 여기에 진액이 부족하게 되면 가슴 부위에 연급이 일어나고 뻐근함이라든지 통증이 나타나니 시함탕과 보중익기탕, 자감초탕을 기본으로 하면 될 겁니다. 육미와 황기건중탕을 함께 넣으면 근본 치료도 되겠죠. 혈압이 높으면 삼황사심탕을 가하는데 이 분은 혈압은 없군요.”

이치로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다들 이의가 없어보였다.

“기침은 없습니까?”

견이 불쑥 물었다.

“아주 가끔 합니다.”

여자는 우울감과 가슴통증이 심하여 기침은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처방한 약으로도 장복하면 기침도 잡힐 것이나 그렇다면 당장은 소청룡탕을 추가하여 선폐(宣肺) 시키면 되겠군요.”

이치로는 조금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맞습니다. 기침 때문에 소청룡탕을 추가해도 되죠. 하지만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견은 환자에게 가까이 갔다.

“기침을 하면 덜 아프십니까? 더 아프십니까?”

여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더 아픕니다. 기침만 하면 가슴통증이 심하여 기침 나오는 것이 무서워요.”

“기침을 하면 덜 아픈 것을 유음(留飮)이라 하죠. 수독이 폐에 정체되어 있다가 기침을 하면 빠져나가 덜 아프죠. 그때는 소청룡탕만 쓰면 됩니다.”

“잠깐! 이분은 지금 가슴통증이 있고 기침을 하는 경우 아닙니까? 그렇다면 통증에 관한 시함탕을 이미 썼습니다.”

이치로가 말을 가로 막았다.

“그 통증은 시함탕의 흉통과 다릅니다. 기침을 하면 더 아픈 경우, 물이 옆구리 아래로 내려가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기침이 나거나 침을 뱉을 때 캥기면서 더 아프죠. 현음(懸飮)이라 하죠. 배농산급탕을 추가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분은 간 울체도 심하거든요.”

견은 이치로의 처방이 그다지 잘못된 것도 아닌데 주제 넘는 참견이 아닌가 싶었지만 여자 환자가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간기(肝氣) 울체(鬱滯)가 심하게 보이고 간열도 있고 폐조도 있어 굉장히 괴로워 보였기에 당장 고통을 해소해주고픈 마음에 끼어들었다.

이혜교가 견을 향해 동조의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여전히 견을 전혀 못 알아보는 눈이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코스케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비하고 나오게. 벌써 8시야.”

“잠깐! 잠깐만요.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코스케가 멈춰 섰다.

“초희를 아십니까?”

코스케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을 뿐 답이 없었다.

“저는 꿈속에서 초희라는 여자 아이와 함께 자랐습니다. 스승인 이시훤의 밑에서 의학을 함께 배웠구요. 그 아이와 저의 지식 수준은 비슷할 겁니다. 그런데 저를 이 시대에 살게 하면서 초희도 살려내셨더군요. 서지영이란 이름으로. 그 아이도 꿈속에서 초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당신들이 책을 가져간 그 쯤 일겁니다. 책을 손에 넣었으니 폐기하듯 지영이를 없앴겠죠. 맞습니까?”

코스케가 견 가까이 왔다.

“왜 서지영이 이초희라고 생각하는 거지?”

“전 분명 서지영과 함께 책을 썼고, 지영이 역시 꿈속에서 초희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저희 꿈은 일치 했구요. 아니라면 그 아이가 어떻게 한방 지식을 알았겠습니까? 당신들이 나를 살려냈듯 초희도 살려냈겠죠.”

“틀렸네.”

“무슨 소리죠?”

“틀렸어. 이초희는 이 시대에 살아나지 않았어. 우린 이초희는 데리고 오지 않았네. 이초희는 400년 전 인물이야.”

견은 코스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서지영은요?”

“서지영은 없는 인물이네. 아무도 그 아이를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이중 꿈일 뿐이야.”

견이 벌떡 일어서 코스케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내 신이었군. 나를 살리고 죽이고 추억까지 만들었다 없애고. 어때? 이쯤에서 날 죽이는 게. 아니지. 내가 당신을 죽이면 신을 죽이는 건가?”

견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코스케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긴 했지만 평온한 얼굴이었고 저항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경호원들이 달려와 견을 떼어 놓았다.

“자네는 여전히 위대한 일을 할 거야. 어서 준비하고 나오게.”

코스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하나만! 하나만 더 물어보죠! 이혜교. 이혜교는 누구죠?”

그때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보세요. 큰일 났습니다.”

병원 관계자가 상기된 얼굴로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신종 바이러스랍니다. 중동에서 온 바이러스라는데, 르스메라고 합니다.”

견과 코스케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바이러스 파악은 됐나?”

병원 의사들은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불안한 듯 말을 더듬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마스크가 건네졌는데 견은 거부했다.

“얼마 전에 중동을 다녀온 사람이 다른 병원에서 확진 판정을 받았고 쉬쉬하고 있었는데, 그 가족이 저희 병원에 검진을 위해 들렀었습니다. 일주일 전입니다. 그리고 저희 병원을 다녀간 사람들이 같은 증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A동에 격리 중입니다.”

“밝혀진 것은?”

“아직까지 밝혀진 게 많지 않은 바이러스라……. 르스메는 비말 감염이고, 중동에서 발생된 급성 호흡기 간염병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인입니다.”

“증상이 어떤가?

“발열, 기침, 호흡곤란 등 일반적인 호흡기 증상 외에도 메스꺼움, 구토, 설사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증상은 감염 후 최소 2일에서 14일 사이에 나타나며,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전염력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2미터 이내에서 기침, 재채기를 할 경우 나오는 분비물로 전파됩니다.”

"진단은?”

“가래, 기관지 세척액의 유전자를 검사하여 진단합니다.”

“그래서 치료약은 있나?”

"아직 예방용 백신과 항바이러스제는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증상에 따라 인공호흡기·심폐보조기·혈액 투석 등의 보조 치료를 통해 증상을 다스립니다. 환자들을 이미 항바이러스 효과가 있다고 입증된 약제를 처방합니다. 고열 등 증상이 완전히 사라져 최장 잠복기, 14일의 2배인 28일 동안 재발하지 않고, 진단검사 등에서 르스메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경우 완치 판정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대증치료를 하겠단 말인가?”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케는 견을 바라봤다.

“간단한 거 아닙니까? 기침이 없으면 갈근탕, 소시호탕, 백호가인삼탕을 쓰고, 기침이 있으면 소청룡탕, 소시호탕, 백호가인삼탕을 쓰면 되는 거죠. 지금 증상을 들어보니 삼양합병이네요. 말 그대로 독감이죠. 다들 아시는 설명일 텐데 할 까요?”

견은 이치로와 이혜교를 바라봤다.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한(寒)의 침범, 여기서 한은 찬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나를 죽이러 들어오는 모든 것을 말하죠. 찬바람이 되든 바이러스가 되든 스트레스가 되든, 한마디로 몸의 항상성을 깨트리는 모든 것이죠. 그러면 몸은 저항을 하죠.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열을 몸에서 발생하여 한을 이기려 하는데, 이때 몸 안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고, 저항하는 상태를 양(陽)이라 하죠. 그래서 오한이 나고, 열이 나죠. 이 단계는 셋으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표(表)에서 나타나는 태양(太陽)병으로 발열과 오한이 동시에 오고 폐와 방광의 위축이 일어나죠. 여기서 막지 못하면 반표반리에서 일어나는데 한과 열이 비슷한 힘을 갖는 것이죠. 그래서 미열이 나기도 하고 더웠다추웠다 하기도 하고. 여기에서도 몸이 지면 리(裏)에서 저항을 하죠. 여기가 몸에서는 최후의 방어선이니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고 고열이나죠. 양명이라 합니다. 대체로 인플루엔자나 독감은 태양 소양 양명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것으로 삼양의 합입니다. 어려울 게 없죠.”

함께한 병원의 의사들은 견의 설명이 마뜩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은 좀 휘황한 설명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한이니 열이니, 양명이니, 보건 당국에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겁니다.”

“약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밝혀진 근거에 따라 대증 치료를 해 나갈 겁니다.”

고참 의사 하나가 발끈했다.

“지난번에 세상을 시끄럽게 한 신종플루, 사스, 모두 제가 말한 약으로 됩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날 때마다 이렇게 공포에 질려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잠복기라 하셨나요? 그건 태양에서 소양으로 소양에서 양명으로 전위되는 과정일 뿐입니다. 갈근탕, 소시호탕, 백호가인삼탕을 합한 과립제나 기침이 있으면 소청룡탕 소시호탕 백호가인삼탕을 함께 쓰면 짧으면 3일, 길면 일주일이면 끝날 겁니다. 죽지 않습니다.”

견이 답했다.

“그래도 그렇게 보건 당국에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코스케가 나섰다.

“그 감염 환자들 어디 있나? 내가 함께 생활하며 류견이 말한 약을 먹겠네.”

다들 경악하는 얼굴을 했다.

“저도 함께하죠.”

견이 나섰다.

“저도요.”

이혜교와 이치로도 나섰다.

“우리를 데이터로 삼게.”

르스메에 감염된 환자들을 격리한 병실로 모두 이동했다. 병에 걸리겠다고 자원한 도전자들과 코스케 회장은 보호 장비가 없었지만 르스메의 위험성을 안 의사들은 고글과 마스크, 장갑, 보호복을 입은 상태였다.

상황은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격리 환자가 백여 명에 달했고, 증상도 심각해 보였다.

“아니!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보고를 안했나?”

“보건당국에 신고해둔 상태입니다. 금방 잡힐 줄 알았는데 이렇게…….”

뉴스에도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방향을 못 잡은 것 같았다.

“저희 병원을 기점으로 감염된 사람들입니다.”

감염자들이 입원한 병실에 견, 혜교, 이치로, 코스케가 들어갔다. 감염자들은 개인 병실에 입원해 있었고 도전자들과 코스케가 각각의 환자 방으로 들어갔다.

“회장님,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코스케는 고개를 저었다.

“수시로 만나기로 하지. 어차피 우린 감염 되러 온 사람들이니까.”

잠복기 때문인지 며칠간은 괜찮다가 이치로가 먼저 증상이 발현 됐다. 기침과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날 모두 모였을 때도 의사들은 중무장을 했고 도전자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이 날은 보건당국 사람들도 참여했다. 중무장 상태였다. 향인제약과 병원이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의료에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에 함께 의논하며 대책을 찾기 위함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왜 이렇게 세상이 조용했나?”

“아직까지 지역사회 감염은 없어 괜한 혼란을 초래하기 싫었습니다. 저희 병원에 접촉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하고 자체 격리 조치 취했습니다.”

“확진자들 상태는?”

“르스메 확진 환자 58명 분석해보니 발열 52명, 기침 20명, 가래 13명, 근육통 13명, 호흡곤란 11명, 두통 8명, 설사 6명, 인후통 4명, 정서 변화 3명, 메스꺼움 2명, 객혈, 복통, 증상 없음 1명, 기타 현기증, 오한 4명이었습니다.”

“모두 약 복용 시작했습니까?”

“네. 기침이 나서 소청룡탕, 소시호탕, 백호가인삼탕 합방에 사이사이 보중익기탕에 황련해독탕을 추가 복용하고 있습니다.”

“어떤가?”

“아직 보통 독감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이치로는 말을 하면서도 기침을 몇 번 했다.

“삼양합병 약 외에 보중익기탕과 황련해독탕을 먹은 이유는?”

“지금의 르스메는 대표적인 온병(溫病)입니다. 감기는 상한(傷寒)이라 하여 찬 기운이 내 몸에 들어와 오한, 기침, 콧물이 나는 것이죠. 상한개념 속에 상한, 중풍, 습온, 열병, 온병 등의 국부적인 영역들이 모두 포함되죠. 보통 찬 기운에 상한 경우 몸을 따뜻하게 하고 매운 음식으로 발산 시키면 잘 낫습니다. 사스 때는 발산만으로 잘 나았죠. 하지만 르스메는 고열이 주증상이고, 탈수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허로(虛勞)와 겹쳐 삼양의 합병과 같은 고열이 납니다. 장기전으로 갈 때는 꼭 체수분 보충을 해야죠. 보중익기탕에 자감초탕, 황련해독탕을 함께 쓰면 이겨내기 쉬울 겁니다.”

코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바이러스는 우리 향인제약의 큰 변환점이 될 거야. 앞으로 수십 수백 가지의 바이러스가 더 나타날 텐데 지금 양방 체계로는 잡기 힘드네. 새 바이러스 나타날 때 마다 그에 맞는 항바이러스를 어떻게 만들어내며, 그 사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죽어나겠나?”

우선 입원환자들에게 한약과립을 먹이기 시작했다. 며칠간 심하게 앓긴 했지만 증상은 호전 되었다.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코스케, 견, 혜교, 이치로 모두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약을 복용했다. 짧으면 3일, 길게 일주일이 지나 모두 완치 판정을 받았다.

“르스메가 엄청난 바이러스라고 하더니 별거 아니군.”

코스케가 크게 웃었다.

향인 병원에서 르스메 바이러스 감염자를 모두 치료한 사이 밖에서는 바이러스 전염을 알리는 발표가 있었고, 향인 병원에 들렀거나 감염자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자진 신고하기를 알렸다.

처음 바이러스가 발병된 환자를 기준으로 2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곳곳에서 의심 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격리와 함께 한약을 복용 시켰다. 대부분 3일에서 일주일이면 완치가 되었다.

외국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르스메는 치사율 40프로에 이르는 바이러스인데 어떻게 일본에서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은 거죠?”

보건당국은 향인 제약에서 사용한 치료약을 발표했고 세계적인 논란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이치로가 대표해서 설명을 했다.

“이제 병을 보는 시각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르스메에 결합하여 억제하는 항바이러스가 없어 치료약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앞으로 들이 닥칠 수백 가지 미지의 바이러스에 항바이러스제가 없다고 인류가 죽어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체의 저항을 돕는 개념으로 약을 쓴다면 어떤 바이러스가 와도 무관한 것입니다.”

방송을 보며 코스케는 하하하 웃었다. 이제 한약으로 세계 의약품 시장을 재패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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